conermusic

코너뮤직 공지사항

코너스 코너

코너뮤직 스페셜

디스코그래피

바이오그래피

아티스트 인터뷰

관련그룹 계보

아티스트 갤러리

코너뮤직 BBS

자유 게시판

질문과 답변

비디오 방

음악관련 게시판

1980년 이전 우리음악

1981년 이후 우리음악

1995년 이후 우리음악

해외음악

음반관련 게시판

음반 구입 정보

중고 음반 장터

엘피 보관 및 오디오

코너뮤직 자료실

앨범 자켓 자료실

문서 자료실

영화 및 기타 사진 자료실



  coner
 http://www.conermusic.com
 ParkKwangSoo.jpg (509.1 KB), Download : 82
 박광수, 67세에 신보를 발표한 국내 블루스의 전설

‘아름다운 강산’을 모르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하지만, ‘아름다운 강산’이라는 명곡을 남겼던 더 멘의 리드 보컬이 박광수였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이번에 박광수가 발표한 새로운 음반은 통산 세 번째에 해당하는 독집음반이다. 하지만, 앞선 두 장의 음반이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사장되어버렸기 때문에, 어떤 의미로는 데뷔앨범이라고 불릴 수도 있는 음반이다. 67세에 데뷔앨범을 발표하는 박광수. 과연 어떤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음악을 좋아하게 된 동기 또, 특히 블루스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다면
11살 무렵 어떤 음악인지 모르고 커다란 제니쓰 라디오를 통해 음악에 심취했는데, 세월이 지난 후에 생각하니 그게 바로 블루스였다. 그때 막 미군방송을 통해 이런 음악이 유입될 무렵이었는데 무척 일찍 접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본격적으로 무대에 오른 것은 언제인가
1964년 8군 무대의 하우스 밴드로 서면서 부터다. 이후 ‘하이 스팟 쇼’라는 무대를 통해 패키지 쇼에 참여했다.


그땐 블루스를 노래하는 보컬리스트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연주자들은 실력 있는 뮤지션들이 많았지만, 보컬리스트 가운데에는 블루스 싱어가 전무했다. R&B가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이전, 블루스를 부르면 백인들은 오프너를 던지며 싫은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물론 흑인들은 열광을 했다. R&B가 보편화 된 후에도 박인수 정도가 R&B를 불렀고, 그 외에는 거의 없었다.


당시 무대에서의 레퍼토리는 대략 어떤 곡들인가
오티스 레딩이나 윌슨 피켓의 노래가 주요 레퍼토리였다. 구체적으로 ‘Stand By Me’, ‘(Sittin' On) The Dock Of The Bay’, ‘In The Midnight Hour’ 등이 있다.


그때 함께 활동했던 음악인들은 어떤 분들이 있는지
며칠 전 세상을 떠난 홍덕표, 재즈의 대가 권충희, 또 서병익 등이다.


미 8군에서 일반 무대로 진출하는 과정에 대해서
무척 복잡한 일이 있었다. 밝힐 내용은 아니지만 아무튼 그 때문에 다른 뮤지션들에 비해 일반 무대로 진출하는 것이 늦었다.


더 멘에 합류하기 이전 활동은
1960년대 후반 실버 코인스의 후신인 영 사운드의 보컬로 잠시 활동했다. 오래 활동하지 않았던 것은 안치행의 팝퓰러한 음악성과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멤버들은 김용년, 장석웅, 김복산, 안치행 등이다. 이후 1970년대 초반 김상희 스페셜 쇼 출신 밴드 비 블루를 거쳐 사랑과 평화의 전신인 영 에이스에서 몇 달간 노래하기도 했다.


더 멘의 결성과정은 어땠는지
신중현이 찾아와서 함께 밴드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신중현은 당시 그룹사운드 협회에서 회장을 맡고 있었고, 나는 총무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기존에 밴드활동을 하고 있는 뮤지션들을 빼 올수는 없었다. 소속 밴드들이 활동하고 있던 클럽이 아니고 이태원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젊고 재능 있는 뮤지션들인 김기표와 동포(문영배)를 발탁했다. 예전 덩키스에서 활동한 적이 있던 이태현도 내가 제안해서 가입했고, 신중현은 손학래를 추천해 밴드가 결성되었다.


1972년 발매 앨범 [장현과 더 멘]이라는 타이틀에서의 불만은 없었는지. 그 타이틀 때문에 사람들은 더 멘의 보컬리스트가 장현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자세하기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결국 나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시발점이 되었다.


더 멘이 주로 활동하던 무대는 어디였나
명동의 로얄호텔 나이트 클럽, 타워호텔 나이트 클럽을 비롯한 극장 공연을 주로 했다. 또 밤에만 공연한 것이 아니고, 낮에도 커다란 레스토랑에서 공연을 갖곤 했는데 주로 학생들이 공연장을 찾았다.


8군 활동에서는 제임스 브라운 풍의 댄스를 선보였다고 들었는데, 더 멘의 음반이나 첫 번째 앨범을 들어보면 춤과는 그다지 관계없는 음악이 아닌가
클럽에서는 주로 외국 음악을 연주했다. 그래도 더 멘의 연주는 춤을 추기에 적합하지가 않아서 종종 업주들이 간섭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신중현은 업주과 타협하면 음악이 산으로 간다면서 “춤을 추고 싶은 사람은 나가라고 해”라는 말로 그들의 이야기를 일축했다. 그만큼 밴드는 상종가를 달리고 있던 시기였다.


1973년에 발매된 독집은 편곡이나 연주를 볼때 더 멘의 음반과 녹음 시기가 비슷한 듯 들린다.
그렇다. 원래 A면은 다른 가수의 곡이 들어가고 내 곡은 B면에만 수록될 예정이었는데, 당시 킹박이 박광수의 온전한 음반을 만들자고 제안을 해서 나머지 한 면을 더 수록했다. 자켓을 봐도 내 얼굴이 조그맣게 들어가고, 나머지 부분은 손가락의 그림자로 처리되었는데 그 손가락이 바로 원래 들어가기로 했던 가수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것이다.


독집에서 편곡에도 직접 참여를 했는가, 아니면 신중현이 박광수의 성향에 맞춰서 손을 본 것인가. 다른 곡은 대개 원곡이 가진 멜로디를 살리면서 편곡이 이루어졌는데, ‘왜’는 박인수의 ‘기다리겠오’와 사비 전까지는 같고 사비만 다른 곡인데
편곡은 모두 신중현이 했다. 기존에 발표되었던 곡을 내 스타일에 맞게 편곡한 것이다. 박인수의 곡은 제대로 안들어봐서 잘 모르겠다.


솔로 앨범 발표 이후에도 더 멘과 활동을 어느 정도 함께 했는지
더 멘이 아니라 이남이, 문영배, 왕준기 그리고 신중현. 즉 엽전들과 함께 지구 레코드에서 다음 음반을 녹음했다. 한 두곡만 더 녹음하면 마칠 수 있었는데, 결국 완성을 하지 못하고 긴급조치 9호로 활동이 묶이게 되었다. 그때 녹음했던 곡 가운데 ‘빗방울’이라는 곡은 정말 멋진 곡이었는데, 발표하지 못해 정말 아쉽다. 지금이라도 지구레코드에 마스터 테이프가 보관되어 있다면 찾아서 음반을 발매하고 싶다.


긴급조치 9호 이후, 1980년 복권될 때까지는 어떻게 지냈는가
음반은커녕 클럽에서도 공연을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나를 구원해 준 것이 김희갑이었다. 모든 것을 자신이 책임진다고 그의 무대에 서자고 했다. 하지만 역시 음악성의 차이로 그렇게 오래 가지는 못했다.


김희갑의 ‘검은 눈망울(하얀 목련의 원곡)’dmf 클럽 무대에서 히트시켰지만, 결국 음반 발매로 연결되지 않았던 이유는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김희갑과 결별했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다시 녹음하자는 권유가 있긴 하지만, 이미 양희은이 히트시켰던 곡을 다시 부르고 싶은 생각은 없다. 개인적으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원곡의 가사가 더 좋았던 것 같다.


김희갑과 결별한 이후의 활동은 어떻게 되나
1980년대 초, 조선호텔 나이트 클럽에서 밴드를 만들어 공연했다. 당시 멤버는 김정택, 전병창, 주훈, 이훈 등이다. 멤버 대부분이 서울대 출신이었다. 이후 엠베서더 호텔에서 리버 사이드 밴드로 활동했는데, 1983년부터 나이트 클럽이 디스코텍으로 바뀌면서 점점 밴드가 설 무대가 없어졌다. 그 뒤에는 솔로로 전향해서 뮤즈 레스토랑이나, 신병하의 티파니 등에서 활동했다.


1981년 최이철이 제작한 음반도 있다고 들었다.
처음부터 취입 계획이 있었던 음반은 아니다. 조선호텔에서 일하고 있을 당시 어느 비 오는 날 최이철이 카세트 테이프 하나를 들고 찾아왔다. 사랑과 평화의 연주가 담긴 테이프였는데, 노래를 부를 마땅한 사람이 없다고 함께 취입하자고 제안을 해서 만든 음반이다. 하지만 음반을 발표한 지 이틀 만에 제작사였던 유니버살 레코드가 문을 닫았고, 결국 음반은 세상에 나오지 못한 채 사장되고 말았다.


계속해서 음반 발매계획이 취소될 때 기문이 어땠는지
나는 음반과 인연이 없구나 생각이 들어서, 다시는 음반을 내지 않는다며 스스로 맹세를 한 적도 있었다.


그 뒤 이번 음반 발표까지 26년이 걸렸는데, 그간의 활동은
앞서 이야기했던 뮤즈 레스토랑과 티파니. 이후에는 약 14년간 삼청동의 재즈 스토리에서 꾸준하게 공연했다.


오랜 기간의 텀을 두고 나온 음반 치고 네 곡이라는 수록곡이 너무 적지 않은가
이번 음반의 작곡을 담당한 김정욱이 너무 바빠서 네 곡 밖에 받지 못했다. 나머지는 외국 곡을 채우기로 합의를 보고 녹음까지 마쳤지만, 일생동안 외국음악을 불러왔는데 음반에도 외국곡을 채운다는 것이 내키질 않았다. 차라리 민요를 편곡해서 넣을까 하다가 그냥 만들어진 네 곡만 수록했다.


김정욱(‘사랑이 저만치 가네’의 작곡자)은 어떤 기회로 만나게 되어 함께 작업을 한 건지
원래 10년쯤 전에 한 제작자가 마음에 드는 작곡가가 있으면 자신이 섭외하겠다고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선택한 작곡가가 김정욱이었다. 그러던 중 재즈 스토리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하루는 김정욱이 베이스 주자로 참가해서 약 5~6년 간 함께 활동하게 되었다.


음반 제작을 하면서 가장 염두에 둔 점이 있다면
나의 음악적인 색깔과 사상을 충분히 표현한,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담고 싶었다.


젊은 뮤지션들과 함께 작업하며 들었던 생각은
감회가 깊고, 기분도 좋았다. 또 믿음이 가고 편했다. 드럼을 맡은 이진우는 스튜디오에 있는 드럼 세트가 못마땅하다며 자신이 가지고 있던 드럼 세트를 가지고 와서 녹음했다. 너무 고마웠다.


앞으로의 활동 계획이 있다면
우성 홍대 주면의 클럽 JD Live에서 매주 목, 금, 토요일에 공연을 하고 있다. 남은 여생동안 좋은 음악활동을 하면서 귀감이 될 만한 음반을 2~3장정도 더 발표하려고 하고 있고, 올해 안에 그 첫 번째 결실을 보기 위해서 단단히 각오를 하고 있다. 존경받는 뮤지션보다는 멋진 음악을 하는 사람이었다고 기억되고 싶다.


후배 뮤지션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TV에 나와서 ‘객기’를 부리면서 스타가 되려고 하지 말고, 진정한 뮤지션이 되라는 이야기를 해 주고 싶다. 연주인이면 연주인으로, 또 가수는 가수로서 인정받는 것이 중요하다. 성형하고 나와서 묘한 동작을 하며 주목을 받으려고 하지만, 음악은 그게 아니다. 음악에는 정서와 시, 또 사랑이 있다. 락이건 헤비메틀이건 혹은 트로트건 아름답지 않은 음악은 하나도 없다. 향상된 음악을 가지고 국민들의 정서를 더욱 풍요롭게 해 주었으면 한다. (월간 핫뮤직 2007년 7월호)


인터뷰 나눔: 박광수, 송명하 (2007년 6월 18일 오후 2시, 서교동 핫뮤직 사무실)
사진제공: 그림자놀이 & (주)파인생스







  박광수, 67세에 신보를 발표한 국내 블루스의 전설  coner 2010/10/21 7829  
6   신촌 블루스의 음악적 뿌리, 이정선  coner 2008/07/28 9355  
5   20년 신촌 블루스의 역사 엄인호  coner 2006/10/18 14290  
4   산울림의 김창완  coner 2005/11/01 9985  
3   하늘바다의 장재환 [2]  coner 2005/06/08 10396  
2   무당의 최우섭  coner 2005/04/06 10230  
1   한대수 [2]  coner 2004/12/30 14665  
1
   
Copyright 1999-2017 Zeroboard / skin by L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