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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울림의 김창완

1997년의 마지막날과 1998년의 새해 첫날로 이어지는 감동의 무대를 마지막으로, 한동안 무대를 떠났던 산울림이 돌아왔다.
8년 만에 모이는 3형제들은 당시와 달리 많은 게스트 뮤지션 없이, 자신들만의 지난 곡들로 팬들과 만날 계획으로 있다.
공연을 앞두고 리더인 김창완을 만나 공연에 대한 이야기와 그의 지난 음악적인 여정들에 대해서 대화를 나눠봤다.



우선 재결합 공연을 축하한다. 연습은 많이 했는가
아직 동생들이 귀국을 하지 않아서 합주는 하지 못했다. 공연을 10일 정도 남겨놓고 연습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인터뷰에서 보니, 앞으로의 음악은 일렉트로니카와 프로그레시브의 성향을 띤 곡들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산울림이라는 그룹으로서인가
그렇지 않다. 산울림은 우선 이번 공연을 성공적으로 치르는 것이 중요하다. 앞서의 이야기들은 개인활동에 관한 이야기이다.


1997년 12월 31일에 가졌던 공연 이후로, 단독공연은 처음인 것 같은데
3형제의 오리지널 산울림이 무대에 선다는 것 자체에도 큰 의미를 둘 수 있다고 하겠다. 이런 기회가 3형제들이 모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이번 공연은 어떻게 기획하게 된 것인지
사실 이번 공연은 우리가 기획하고 성사시켰다고 하기보다는 팬들이 만들어 놓은 공연에 우리가 초대된 느낌이다. 그들이 없었으면 시작하기 어려웠던 행사다.


기타는 언제부터 연주하기 시작했는가
대학 1학년 때이니 1971년부터다. 작곡도 그때부터 시작했다.


기타를 익혀 나가며 3형제로만 이루어진 그룹을 만든다는 것을 의도한 것인가
내가 기타를 살 때 둘째(김창훈)도 함께 기타를 사고, 막내(김창익)은 그저 수저통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룹 결성은 그런 식으로 저절로 된 것이고, 의도한 것은 아니다.


그룹 결성 이후에 1회 대학가요제 예선에 참가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때는 산울림이 아니라 무이(無異)라는 이름으로 참가했지만, 내가 재학생이 아니라 졸업생이었다는 이유로 탈락했다. 당시 참가곡은 ‘문 좀 열어줘’였다.


그렇다면 그 이후에 산울림의 첫 번째 음반 발매를 위해 요즘 하는 것처럼 데모 테입을 만들어서 음반사들을 방문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산울림의 첫 번째 음반은 사실 음악계에 데뷔하기 위해 만든 음반은 아니다. 당시 서라벌 레코드에서 돈을 안가져와도 좋으니 음반을 제작해준다고 해서 발표한 음반이다. 사실 그 음반을 판다거나 하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고, 목표는 그저 음반 취입이었다.


산울림의 1집에서 3집까지의 수록곡들은 전체적인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 작곡이나 연주, 녹음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된 것으로 보인다.
맞게 봤다. 처음 생각은 1년이면 10장의 음반 정도는 발표할 수 있으리란 생각이었다. 하지만, 3집 이후에 조금씩 늦춰졌다.


초기 산울림의 음악에서는 C.C.R.이나 조 사우쓰(Joe South)의 음악풍이 느껴진다. 이들의 음악을 즐겨 들었는가
그렇다. 하지만, 산울림의 음악은 어떤 형식이나 장르에 얽매이지 않은 음악이기 때문에 특정한 몇몇 카테고리로 분류하긴 어렵다.


산울림의 음악이 해외의 사이키델릭 매니아들 사이에서 관심을 얻었던 것은 특유의 퍼즈 기타 사운드의 영향이 컸다. 녹음시에는 어떤 이펙트를 사용했는가
당시 딜레이는 없어서 사용하지 못했지만, 퍼즈나 와와, 페이저와 같이 다양한 악세사리를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첫 녹음에서는 그때까지 연습하던 악기들을 들고 찾아가서, 두 소절만 치면 기타의 튜닝이 틀어지는 관계로, 다음날 팬더 텔레캐스터를 빌려서 녹음했다고 들었다.
빌린 기타로 연주해 보니 정말 황홀할 만큼 소리가 좋았다.


세 번째 음반에 수록된 ‘그대는 이미 나’와 같은 대곡은 당시 산울림이 인기가 없었다면 도저히 수록될 수 없는 곡이었다고 생각한다.
동생들의 입대를 앞두고는 하루에 300명 정도의 팬들이 매일 집으로 찾아왔다. 나중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아예 그들에게 집을 내준 경우도 있었다.


일관성을 가지고 있던 1집부터 3집까지의 작업에 이은 4집은 인형극이나, 만화, 영화의 주제가들이 많았는데 어쩐지 조금 짜깁기 음반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실 개인적으로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음반이다. 당시 음반만 내면 잘 팔리니까, 무리하게 강행해서 만든 음반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나왔던 ‘빨간풍선’역시도 그런가
그렇다. 당시 드라마가 히트하면서 사람들이 음반을 찾아서 급조한 음반이다. 산울림의 곡은 몇곡 되지 않고, 다른 가수들의 곡들로 채워졌다. 캐롤 음반도 나온 적이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상업적인 의도로 발표된 음반이다.


‘빨간풍선’음반을 보면, 옛 가요인 ‘바다의 교향시’를 불러서 취입했는데
TBC에서 옛 가요를 현대화하는 일환으로 당시 ‘잘 나가는’가수들에게 예전의 곡들을 다시 부를 것을 권유한 적이 있었다. 산울림 역시도 당시 상종가를 치던 밴드였기 때문에 그러한 의뢰를 받았고, 우리만의 독특한 사운드로 편곡을 해서 수록했다.


5집은 두 동생들이 군에 가 있을 무렵 발매된 음반인데
사실 준비는 입대하기 이전에 했고, 릴리즈 타이밍만 이후에 정해서 발표했다.


산울림의 첫 공연은 구자룡이, 두 번째 공연은 박영걸이 주최한 것으로 알고 있다
첫 공연은 지금 이야기 하자면 쇼케이스 형식의 공연이었다. 당시 DJ 연합회가 주축이 되어 진행되었던 공연으로, 다운타운으로 홍보하는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그들의 조직적 활동을 통해 히트곡이나 가수가 나오는 시기였으니, 여러모로 의미가 있는 공연이었다. 두 번째 공연은 공연이 끝난 이후 팬들이 던진 꽃다발로 무대가 꽃밭이 될 정도로 황홀한 공연이었지만, 정작 개런티를 지급 받지 못했던 공연이었다. 당시는 이런 일들이 참 많았다.


음악 외에 비즈니스에 관해서 어두웠던 때문인가
그렇다. 나는 가요계에 있기만 했지, 비즈니스적 측면에 대해서는 너무나 어두웠다. 그때 산울림의 매니저는 주영철이 담당했었는데, 지금 생각한다면 보다 좋은 프로모터를 만났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창문 넘어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가 수록된 6집은 솔로음반의 형식을 띤 음반으로 보인다
그때는 동생들이 군대에 있을 무렵이라서 ‘고장난 우주선’이라는 그룹과 음반을 만들었다. 멤버는 베이스에 박동률, 기타에 유지연 그리고 드럼은 김영국이었는데, 김영국은 ‘나 어떡해’로 대상을 받을 당시 샌드 페블스의 멤버였다.


멤버들이 제대를 한 이후 발표된 7집 음반은 서라벌에서 대성음반으로 이적한 이후 발표된 첫 음반이다. 대성음반에서는 음악활동 이외에 회사에 관한 일도 맡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대성음반의 대표인 이홍주 사장이 서라벌에서 전무로 있을 때 우리를 발탁했던 인연 때문이다. 대성음반에서는 이사 자격으로 여러 신인들을 발굴했다.


7집의 사운드는 앞서 음반의 사운드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그 음반부터 멀티트랙 레코딩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의 녹음은 모두 2트랙 녹음으로 이루어졌다.


그룹 활동과 함께 많은 다른 뮤지션들의 음반에 관여한 것으로 알고 있다. 우선 노고지리의 경우 그들의 두 번째 음반은 ‘성주풀이’가 수록된 첫 번째 음반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가장 산울림과 유사한 성향의 음반이었다.
음반사 사장의 소개로 노고지리를 알게되었고, 두 번째 음반에 수록될 곡들을 작곡해줬다. 하지만, 처음 녹음해 온 것을 보니 의도와는 전혀 다른 음악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어레인지에 참여를 하고 직접 연주를 했다.


노고지리 이외에도 서라벌 레코드 소속일 때는 김신덕, 박일준, 손미나 등의 음반에 곡을 준 적이 있는데
주로 음반사에서 연결해 준 경우였다.


작곡 이외에 기타 세션만으로 다른 뮤지션의 음반에 참여한 경우는 없나
없다


산울림의 활동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을 무렵, 꾸러기라는 중창팀을 구성해서 활동했는데
기획가수 한사람 한사람을 만들기에는 너무 힘들어서, 동호회 형식을 선택했다. 우선 모임을 만들고 이후 각자의 솔로활동을 활동을 도와주려고 만든 그룹이었다. 의도대로 임지훈, 최성수, 윤설희, 신정숙, 현희 모두 솔로 음반을 발표했다. 이후에 조직한 동물원도 마찬가지의 경우였다.


꾸러기는 당시 100일 공연이라는 대단한 공연을 소화했던 그룹이었는데, 공연의 기회가 그렇게 많지 않았던 산울림 활동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을 것 같다.
사실 꾸러기의 공연은 내가 참여할 공연은 아니었다. 당시 그들이 너무 무명이었기 때문에 함께 공연을 하게되었다. 공연 덕분에 꾸러기와 그 멤버들이 많이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현희의 솔로음반은 당시 ‘한국의 재니스 조플린을 만들고 싶다’는 보도와 마찬가지로 ‘슬픈 모습 보이기 싫어’와 같은 강렬한 곡이 수록되었던 반면, ‘쌍고동 사랑’과 같은 의외의 트롯넘버까지 수록된 음반이었다.
당시에는 음악적인 욕심이 많아서, 특별히 장르를 고집하지 않고 이일 저일 가리지 않고 하는 편이었다.


대성음반에 있을 무렵 만들었던 인희의 [다이나마이트 걸]과 같은 음반의 제작 동기가 있다면
당시 많은 가수 지망생들이 음반사로 찾아왔다. 그들 가운데 한사람이다.


어금니와 송곳니가 취입했던 ‘동화의 성’이나, ‘숨길 수 없네’와 같은 곡들은 산울림이 녹음하기 이전에 발표되었던 곡인데
원래는 김정택, 김이훈 등이 조직했던 그룹인 운명에게 준 곡이었는데, 보컬이 해결이 안되어서 나중에 산울림의 음반에 수록했다.


운명과 함께 녹음한 음반은 ‘내친구 ET’가 수록된 음반 밖에는 없다고 알고 있다
사실 그 음반도 어찌 생각하면 우스운 음반이다. 영화도 한번 보지 않은 상태에서 그냥 만든 사운드트랙이다. 지금이라도 스티븐 스필버그가 안다면 뭐라고 할지 모르겠다.


운명이라는 그룹 이름은 현숙의 ‘정말로’가 수록된 음반에도 세션으로 참여한 적이 있는데
그들은 당시 전문 세션 집단이었다. 나는 당시 참여하지 않았다.


대성음반에 있을 당시 12인치 싱글 음반으로 [산울림 스페이스 사운드 디스코]와 같은 여러 음반들이 선을 보였다
그땐 디스코가 주류 음악이었다. 많은 부분이 상업적인 의도로 발매된 음반들이다.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탐탁지 않게 생각되는 음반들이다.


일본은 통해서 3장의 베스트 음반이 CD로 발매된 것이 산울림의 첫 번째 CD라고 알고 있다. 일본 진출의 계획은 없었는지
사실, 그 음반이 발표되고 초청 같은 것을 바랬는데, 별다른 피드백이 없었다. 사실 일본이나 미국으로 공연을 떠나는 뮤지션들은 많지만, 개인적으로는 교포 위문과 같은 공연은 관심이 없었다. 그 뒤에 산울림으로서가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대마도의 한 일본인이 초청을 해서 몇 차례 공연을 한 적이 있었다. 나름대로 보람이 있었던 공연이었다.


김창완 개인적으로는 [Postscript], 산울림으로는 13집 이후에 음반발표가 없었는데, 새로운 음반 발매계획은 어떻게 되나
사실, 음반에 수록될 곡들은 모두 만들어 두었다. 하지만 지금 음반을 발표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지, 또 지금의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아서 음반 발매를 늦추고 있는 중이다. 아마 ‘때’가 되면 발매될 것이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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